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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8 국회의원 재보선의 의미는 이튿날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묻혀버렸다. 비록 입법과정에 대리투표 등의 위법행위가 인정되는 법률안이지만 그 가결선포는 무효하지 않다는 다소 낯선 논리로 구성된 이 결정을 비웃는 패러디의 발호에 자위하면서 우리는 1년6개월 만에 왜 재보선을 했는지는 벌써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용지 한 표의 기표는 투표소 밖의 천 마디 패러디보다 훨씬 중차대하다.
내년 6월 2일은 동시 지방선거일이다. 약 4000만 명에 이르는 유권자들이 전국 246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일제히 그 대표자들을 선거한다. 동시선거란 이처럼 유권자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함께 선거할 뿐만 아니라 시·도지사, 지역구 시·도의원, 비례대표 시·도의원, 시·군 구청장, 지역구 시·군·구의원, 비례대표 시·군·구의원, 시·도교육감, 시·도 교육의원이라는 여덟 명의 대표자들을 한꺼번에 뽑는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유권자들은 내년에 투표소에서 투표용지를 여덟 장이나 건네받을 것이다. 이처럼 투표용지에는 우리 공직선거의 여러 문제점들이 응축되어 있다.
2007년 12월 대통령선거와 함께 실시된 경남, 울산, 제주, 충북의 시·도교육감선거에서는 대통령선거의 당선자와 같은 기호를 받은 후보자가 모두 당선되었다. 이는 우연일 수도 있지만 지방선거 투표용지의 기호제도에 관해 불공정성을 지적하는 목소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새삼 들려주는 것이었다.
투표용지에는 기호, 소속 정당명, 성명을 차례로 표시하되 기호는 1, 2, 3 등으로 하고 정당의 당원이 아닌 후보자의 소속 정당명란은 '무소속'으로 표시한다. 그리고 투표용지에는 후보자등록 마감일 현재 국회에 의석이 있는 정당의 추천을 받은 후보자, 의석이 없는 정당의 추천을 받은 후보자, 무소속 후보자의 순위로 게재하되 의석이 있는 정당은 다수 의석순, 의석이 없는 정당은 정당명의 가나다순, 그리고 무소속 후보자들은 성명의 가나다순으로 게재한다. 다만 정당이 후보자를 추천할 수 없는 시·도교육감선거의 투표용지는 후보자 성명의 가나다순으로 게재하나 시·도 교육의원선거의 투표용지는 그 후보자들을 어떻게 게재할지 아직 미정이다.
투표용지의 문제점은 첫째, 이것이 기호 본위로 인쇄되어 있다는 것이다. 선거에 관해 그동안 귓전이 따갑도록 들어온 말이 '인물' 본위인데 정작 투표용지를 접하면 인물보다는 정당이, 정당보다는 기호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말 없는 투표용지는 이처럼 기호와 정당 본위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지방선거의 투표용지에 정당명이 처음 나타난 것은 31년 만에 부활한 1991년의 시·도의원 선거에서였다.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정당은 지방선거에 후보자를 자유로이 추천하였지만 투표용지에는 정당명이 없었다. 그 방식이 좋겠다.
둘째, 이 기호(투표용지 게재순위)를 최근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에 따르게 함은 국회의 주요 정당들에 의한 지방선거 투표용지의 게리맨더링으로서 지방선거를 국정선거의 결과에 예속시키는 것이다. 현재 국회에 제출된 15건의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 개정안과 86건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의 일부가 주장하는 대로, 1960년까지의 지방선거에서처럼 기호는 선거구별로 따로따로 등록 후보자들의 추첨으로 정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다.
셋째, 국회에 5인 이상의 지역구 국회의원 등을 가진 정당이 추천한 후보자에게는 교육감 및 교육의원의 선거를 제외한 나머지 지방선거에서 통일기호가 부여된다. 그래서 지금대로라면 내년에 16인을 뽑는 시·도지사 선거, 733인(비례대표 78인 포함)을 가리는 시·도의원 선거, 230인을 고르는 시·군·구청장 선거, 그리고 2888인(비례대표 375인 포함)을 뽑는 시·군·구의원 선거의 수억 장에 달하는 투표용지가 한나라당 후보 1, 민주당 후보 2로 인쇄되어 투표소를 찾는 유권자들에게 6장씩 교부된다.
1998년 지방선거에 등장한 이 통일기호는 대중매체와 어우러져 전국 수천 개의 선거구마다 서로 다른 선거이슈를 잠재우고, 지역주의 풍토와 상승 작용하여 '묻지 마 투표'를 부추겨 온 선거법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다. 이를 내년에 다시 보는 일은 부디 없도록 하자.
--------------------------------------------------------------------------------------------------- * 2009년 11월 9일자 국제신문 [시사프리즘]에 실린 내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