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양심과 병역 의무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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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광수 작성일04-05-29 14:14 조회4,540회 댓글0건본문
[시론] 양심과 병역 의무 사이
*** 조광수 [부산경실련 집행위원장 / 영산대 교수] ***
올해 쉰 살인 윤모씨는 전과자다. 20대 초반에 종교적 이유로 병역 의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
는 3년을 복역하고 출감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외아들도 똑같은 이유로 수감 중이다. 우리나라에
는 윤씨처럼 종교적 이유로 병역을 거부해서 전과자가 된 사람이 1만 명쯤 된다. 그리고 현재 500
명 정도의 윤씨 아들 같은 젊은이들이 같은 이유로 수감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논쟁적인 판결이 하나 나왔다. 지난 21일 서울 남부지법의 이정렬 판사는 이른바 '양
심적 병역 거부자'의 자유를 국가가 보장해 주는 것이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사는 판결
문에서 양심의 자유에는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도 포함된다고 전제하고는
양심 때문에 집총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비전투 분야의 사회 봉사활동 즉 '대체 복무제'를 제시했
다.
물론 1심 단독 판사의 판결일 뿐이다. 상급심에서 뒤집힐 수도 있다. 그리고 양심적 병역 거부는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이미 여러 차례 판결한 대법원의 판례와도 다
르다. 무엇보다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다. 60% 이상의 여론은 이 판결이 특정 종교에 대
한 특혜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고 동기가 순수하지 않은 사람들의 비양심적 병역 기피 수단
으로 악용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최종적인 결론이 어떻게 나든 이 판결은 일단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
실 양심 때문에 집총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감옥이냐 대체 복무냐 하는 선택은 큰 차이가 없을 것이
다. 남북 분단이라는 우리의 특수 상황 때문에 설령 이론적으로 대체 복무제를 인정하더라도 병무
행정상 실제로 실시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영산대 교수·중국 정치학
그럼에도 이 판결은 우선 자유의 개념을 발전시켰다는 의미가 있다. 자유니 인권이니 하는 가치는
처음부터 보장된 것이 아니라 많은 대가를 지불하면서 꾸준히 신장되어 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국가의 형벌권이 충돌하는 경우 개인의 자유 보장이 우선한다는 판결은 우
리 사회 자유 개념의 한 발전이다.
두 번째로 이 판결은 우리 사회에 수준 높은 담론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의미가 있다. 사실 우리는
오랜 기간 국가주의에 익숙해 왔다. 국가 주도의 성장 그리고 국가 주도의 개혁에 따라 왔다. 그런
데 국가가 요구하는 의무와 개인의 양심의 소리가 충돌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이제 진지하
게 토론하고 공방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성숙해진 셈이다. 이런 논쟁을 보수와 진
보 간의 갈등이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정의로워져 가는 과정의 '작은 몸
살'일 뿐이다.
세 번째로 이 판결은 남북한의 평화 협상 나아가 군축을 촉구하는 의미도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매년 고등학교마다 한 학급씩 줄여야 할 정도로 청년 인구가 줄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행 군대
규모를 유지하려면 대체 복무제는커녕 용병이라도 들여와야 한다. 그러니 대체 복무제 논의가 탁
상공론이 아닌 실현 가능한 정책이 되게 하려면 남북한 간의 군사적 긴장을 줄여야 하고 군축이 이
루어져야만 한다.
정말 정치권에서 대체 복무제 입법을 논의할 의사가 있다면 '복무 기간을 얼마로 하고 어떤 영역
의 봉사 활동을 지정할 것인가' 하는 미시적인 고민보다는 먼저 큰 틀에서 군축에 관한 깊은 고민
을 해야 할 것이다. 징병제를 지원제로 바꾸고 소수 정예화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등의 근본적인 조
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대체 복무제라는 예외만 논의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중세 시대에도 형평재판소라는 곳이 있어서 현행 법률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사건을 판사의 직권으
로 판결해준 바 있었다. 사실 이런 전통은 지금도 남아 있다. 법과 정의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법
이 좀 더 정의에 가까워지게끔 진보적인 판결을 내려주는 곳이 바로 사법부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
적 병역 거부에 대한 이번 판결은 신선한 충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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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5. 27 국제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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