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래의 메타경제] 아시아적 가치의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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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대 글로벌경제학과 명예교수

19세기로 접어들어 서양이 세계의 패권을 잡게 되면서, 동양에 대한 그들의 시선은 이전과는 완전히 바뀌었다. 한때 신비롭고 본받아야 할 이상향으로까지 생각했던 동양에 대해 그들은 멸시의 시선을 보내기 시작하였고, 주체할 수 없는 깊은 우월감에 젖어 갔다. 그 연장선에서 정체되고 무기력한 동양은 서양의 지배를 통해 문명화될 수 있다는, 오랜 시간 유럽 사회를 지배했던,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이 만들어졌다.

동양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인구 때문에 밑바탕에는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이 고도성장을 이룰 때까지 멸시의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일본에 이어 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이 세계를 놀라게 했을 때, 비로소 그들은 아시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려 하였다. 유교적 덕목과 높은 교육열 그리고 효율적인 관료조직 등이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한 요인이라고 평가하였다.

교육열·효율적 관료조직 경제성장 기여

정실 자본주의·초저출산 진화에 발목

서구 아닌 우리 눈으로 성찰해야 할 때

그러나 아시아가 잠시라도 틈을 보이면 다시 비판적 시선이 빠르게 대체하였다. 1997년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외환위기 때를 떠올려 보면 명확해진다. 왜 동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위기에 빠졌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서구의 학자들이 들이댄 논거는 ‘아시아적 가치’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불과 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시아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것이 아시아적 가치 때문이라 칭찬하더니, 위기를 맞으니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성장을 가져왔던 그 덕목이 바로 위기의 원인이라고 지목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서구가 제기한 아시아적 가치란 ‘정실 자본주의’라는 말로 요약되었다. 연줄과 정실에 의해 투명하지 않은 동양의 경제 운영 방식이 부정과 부실을 가져와 위기를 불러왔다는 주장이었다.

수없이 경제위기에 빠져 여러 차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았지만, 여전히 침체에 시달리는 남미와 달리 ‘정실 자본주의’라는 비판을 받는 동아시아 국가들은 빠르게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것도 정실보다는 시장에 근거한 합리성을 통해서였다. 나아가 지금은 동아시아 전체 국가들이 세계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동아시아 특히 동북아 경제를 살펴보면서 조만간 다시 그 ‘아시아적 가치’가 문제라는 비판을 서구로부터 받을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다. 얼마 전 중국에서 유학을 온 대학원생들과 동아시아 경제를 토론하면서 주요 통계 지표들을 함께 검토해 본 적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구 지표가 정말 특이했다.

세계인구통계를 살펴보았을 때, 일찍이 저출산을 겪고 지금은 어느 정도 회복한 일본을 예외로 한다면,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들의 다수가 동북아 국가들이었다. 한국을 필두로 중국과 대만 그리고 홍콩과 싱가포르는 모두 세계에서 최저의 출산율을 보이는 나라들이다.

여기에 일본까지 포함한다면 초저출산 국가들은 과거 유교문화권에 있었던 나라들로서 오랫동안 공통된 가치체계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각국의 경제 기반이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운용 방식에도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국가들이 가장 심각하게 저출산을 겪고 있는 것은 무언가 밑바탕에서 공통으로 작용하고 있는 영향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가족 간의 높은 연대 의식, 집권화된 정치권력, 관 우위의 전통, 집단주의와 낮은 여성의 지위 등 서구와 비교할 때 구별되는 아시아적 특징들은 명확하게 존재한다. 여기에 고도성장으로 인한 엄청난 도시집중과 이에 따른 부동산 가격의 폭등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한때는 성장을 촉진했던 아시아적 덕목들이 이제는 진화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에도 서양은 아시아의 엄청난 인구를 ‘황색 위협(yellow peril)’이라는 표현으로 두려움을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초저출산의 함정으로 빠져들고 있는 동아시아의 인구 동향은 서구가 오랫동안 품어 왔던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나아가 아시아의 정체와 인구학적 위기에 대해 과거보다 더 단호하게 ‘아시아적 가치’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목소리를 높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 각국 모두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인구 감소의 위협과 성장의 정체에 대해 좀 더 넓은 시선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때로는 아시아 성장의 원천으로 또 때로는 위기의 근원으로 지목되어 온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 서구의 시각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성찰해 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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